1년에 한 번, 그 어떤 살인도 허락되는 날이 있다면? 예전에는 하루쯤 그런 날이 있어도 괜찮지 않겠나 싶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자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한다면 이 하루를 온전히 바치고 싶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겁이 많아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좀 더 살아보니 인간들이 그 시간을 꼭 나름대로 정의구현을 하는 데 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
폭행사건의 원인이 마스크 착용 권고 때문이었다는 뉴스 보도, 묻지마 살인, 데이트 폭력, 길고양이 학대, 아동학대.... 갈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매체의 다양화로 사건 사고 소식에 우리가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보니 이런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씩 이런 기상천외한 소식이 전해져 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참지 않는 와중에 숙청의 날이 허락되면? 과연 폭력과 살인이 그날로 끝날 수 있을까?
1년 중 단 하루, 살인이 허락되는 날에 대해 다룬 영화가 있으니 바로 <더 퍼지> 시리즈다. 제목만 알고 있다가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겨서 영화를 보게 됐다. 소재 자체도 흥미롭고 은근히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는 영화다. 참고로 내가 본 것은 더 퍼지 시리즈 중에서도 2편에 해당하는 <더 퍼지2 거리의 반란>이다.
‘숙청의 날’이라는 설정은 1편과 동일하다. 사상 최저 실업률과 범죄율의 미국, 완벽한 모습 뒤엔 매년 단 하루, 12시간동안 살인은 물론 어떤 범죄도 허용되는 ‘퍼지 데이’ 가 있는데, 그 날은 모든 공권력이 무력화되고 오직 폭력과 잔혹한 본능만이 난무한다는 설정이다. 개소리 처럼 들릴 테지만 강력범죄의 피해자,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 사람, 타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날이 있다면...'하고 상상을 해볼 법하지 않을까? 나만 해도 죄에 비해 가벼운 형량을 받은 사례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복수나 벌을 받아 마땅한 자를 숙청하는 것은 이 숙청의 날의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상했듯 영화에서는 가면을 쓰고 단지 재미로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들도 많이 등장한다. 사냥하듯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한 술 더 떠서 부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숙청할 사람들을 찾아다 주는 이들도 있다.
부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부자들이 숙청의 날을 즐기는 방식은 일반인과 차원이 달랐다.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는 숙청이 어떤 분노를 푸는 창구도 아닌 것 같았다. 재미로 살인을 하되 고상함은 잃지 않고, 새나 토끼를 사냥하듯 인간을 죽이는 게 그들이 숙청의 날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 자기들의 그룹에 속해 있지 않은 자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모습에 갑질 이슈를 떠오르기도 했다. 직원을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기계, 분노를 처리하는 쓰레기통 쯤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스릴러 영화를 보다 보면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꼭 넌씨눈을 곳곳에 배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숨을 죽이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쓸데없이 한 마디를 한다든지,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이용하려 한다든지. 이 영화에는 이런 인물들이 모두 등장한다.
실컷 살려뒀더니 ‘우리를 살려놓고 그냥 가려고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 주인공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거짓말한 사람, 실컷 구해줬더니 도와준 이를 의심하는 사람, 긴박하게 도망가는 와중에 ‘당신은 숙청의 날에 왜 무기를 들고 거리에 나와있냐’부터 시작해 꼬치꼬치 캐묻는 물음표 살인마까지. 너무 무서워서 다리가 풀려서 못 일어나는 통에 죽을 뻔 한 것까지는 무서우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보겠지만 저 쓸데없는 말 내뱉는 등장인물들은 진짜 좀 혼이 나야겠다.
게다가 내 기억엔 주인공이 구해준 네명 중 아무도 고맙다는 인사 한번 없었다. 이런 경우 없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주인공은 자신의 볼일을 보지 못할 뻔 한다.
영화 속에서 퍼지 데이를 제정한 이유를 범죄율을 줄이기 위함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은 하지만 사실은 교도소 운영비를 줄이고 무기를 팔아먹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데 국가가 허용을 하냐 안 하냐에 따라서 범죄가 되거나 안 된다는 점, 퍼지 데이가 끝나는 그 순간을 전후로 살인이 무죄와 유죄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게 참 비현실적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런 날이 한번쯤 있으면 좋겠다고 가볍게 생각했다면,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러면 안 되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굳혀지고 있다.
더 퍼지:거리의 반란
1년 전, 단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뒤 복수를 위해 나선 한 남자갑작스런 차 고장으로 거리 한복판에 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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