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되어 작은 창고에 갇혀 살다 납치범의 아이를 낳은 여자 이야기'를 담은 영화 <룸>을 봤다.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도 한 번 들어본 이야기인 것 같아서 찾아보니 엠마 도노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자신이 낳은 납치범의 아이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다 극적으로 탈출을 감행하고 창고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주인공 조이는 강아지를 도와달라는 한 남자(닉)의 거짓말에 속아 납치된다. 그때 조이의 나이가 17세, 닉에게 끌려온 조이는 닉의 집 마당에 있는 작은 컨테이너에서 7년을 보내게 된다. 말이 7년이지 그동안 조이는 원치 않은 임신으로 닉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다섯 살이 됐으며, 조이의 부모님은 서로 이혼을 했다. 어디 그뿐만이랴, 1~2년 만에도 휙휙 바뀌는 게 세상인데, 7년 동안 천장에 있는 작은 창문이 고작인 좁은 창고 안에서만 지냈다.
그런 조이가 '나 없는 동안 변해버린 창고 밖'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쉬울까? 어쩌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창고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잭보다 조이가 더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의사의 말대로 잭은 플라스틱 같아서 금방 적응했지만 조이는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잭이 세상에는 볼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동안 조이는 잃어버린 7년에서 벗어나지 못해 깊은 잠으로 도피하려 하다 결국은 자살을 시도한다. 창고에서는 잭이 세상의 전부였지만 창고 밖에는 부모님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어릴 적부터 쓰던 방이 있고, 자기 자신이 있다. 아마도 조이는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끝없이 '7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더라면'을 상상했을 것이다. 어릴적 꿈을 이뤘을 수도 있고 부모님이 이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이는 이미 변해버린 것들에 대한 낯설음,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데 대한 상실감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잭이 창고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면서 '진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있고 병원이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고 나무가 있는 진짜 세상에 처음 나온 잭에게는 너무 당연한 반응이다. 내 눈에는 오히려 잭이 영웅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나도 처음 겪는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려운데 이제 겨우 다섯 살 생일을 맞은 꼬마가, 지금까지 가짜인 줄로만 알고 있던 세상에 처음으로 나가 엄마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가.
조이가 병원에 가 있는 동안 잭은 엄마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천천히 세상 밖으로 나가보려 한다. 레고로 자신이 나고 자란 룸과 비슷한 모형을 만들다 나중에는 레고 룸을 무너뜨리는 장면에서 잭이 자신과 세상은 물론, 엄마와 세상이 화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짐작했다.
퇴원하고 돌아온 조이에게 잭은 룸에 한번 가보자고 한다.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엄마가 죽으려고 했을 정도로 힘들어한 것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해보려 했던 잭이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해서 꺼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어진 장면에서 잭이 룸에 살 때 매일 모든 사물에게 아침인사를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의자, 세면대, 옷장, 창문 하나하나에 작별 인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영화 <룸>이 특별한 이유는 피해자들을 다루는 방식이 특별해서다. 특별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방식이다. 영화가 아니라 진짜 세상에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이가 진짜 세상을 받아들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준 잭처럼 우리도 피해자들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 '너만 힘든 것 아니야', '니 잘못은 없는지 생각해봐'라며 피해자의 "쾌유"를 재촉하는 것은 상처를 입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할 뿐임을 알고 있어야 하겠다.
룸
7년 전, 한 남자에게 납치돼 작은 방에 갇히게 된 열일곱 살 소녀 ‘조이’세상과 단절된 채 지옥 같은 ...
movie.naver.com
'이 영화, 안 본 눈 삽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Bridesmaids, 2011) 스포 있을유 (0) | 2020.09.05 |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 스포 있을유 (0) | 2020.09.04 |
완벽한 거짓말(Un homme ideal, 2014) 스포 있을유 (0) | 2020.09.02 |
더 퍼지2 거리의 반란(The Purge: Anarchy, 2014) 스포 있을유 (0) | 2020.08.30 |
언프렌디드:다크 웹(Unfriended: Dark Web, 2018) 스포 있을유 (0) | 2020.08.29 |